12-20-2024
따뜻한 연말 메세지:
모두가 순간의 몰입에 충실하고 있다고 생각을 하면 사랑밖에 생길 일이 없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내년의 더욱 친절한 세상을 기대하며 – 메리 크리스마스.
09-26-2024
우리는 고민한다. 양재천의 돌다리처럼, 하나를 껑충 넘어서면 허무함을 느낄 새도 없이 다음 고민에 내려앉는다. 뻔히 어떤 고민에 취해 내가 좋다고 고백한다. 아마 그때 우리는 사람들로부터 벗어나 물가에 앉아 달을 보며, 담배 같은 것을 태우고 있을 테다. 이런 곳에서의 솔직함은 부끄럽지가 않다—는 합의의 과정을 과감하게 생략했다. 중요한 것은 항상 어떤 마음을 나누고자 할 때에는 그럴 만한 상황과 그렇지 못한 상황이 있다는 것이다. 부끄러운 욕심이 있으면 겁을 내기 마련이다.
물론 나도 고민의 작용으로 내게 고백을 늘어놓는 그의 역할을 취했을 때가 있다. 내 옆사람도 그렇고, 그 옆 사람도 그러하다. 분명 지금 내게 말을 하는 이 또한 반대의 입장에서 난처함을 느낀 적이 있을 테다. 기억은 이럴 때 피곤하게 작동한다.
번거롭게도 우리는 다른 지점의 서로를 닮았다. 어떠한 특별함도 없다는 것이 결국 내게 상냥함을 가능하게 한다. 그의 손을 꼭 잡아주고, 기꺼이 어떤 계기나 수단이 되어줄 의무가 있다. 다만 모두가 특별하다는 말은 거짓이라 하지 못하겠다. 특별함이 없다는 말도 내 진심이 아니라서 하지 못하겠다. 그로써 나를 초라한 고민의 돌다리 위에 서 있게 하더라도, 지키고 싶은 것들이 있다.
인간의 사랑은 특별함을 지키는 데서부터 포기되는 권위로 증명됨. 그것을 느끼는 하루다.
08-23-2024
유독 말씨름 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 있다. 말씨름을 즐긴다기보다는 자신의 신념이 얼마나 굳건한가에 대해 유려하게 말을 할 줄 아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 있다! 다시 말해, 그것을 통해 세계관을 굳건히 하는 것을 업으로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곳에서는 동그랗게 앉는다. 서로의 세계관을 존중할 때에는 즉물적인 사이 공간이 필요한 모양이다. 말에 덩어리감이 있다. 그것을 둘러 앉는다. 마치 아레나에 앉아서 검투를 구경하듯이 말이다. (‘아레나’라는 어휘가 잡히는 까닭은 최근 S가 나의 그림을 아레나와 같다고 했기 때문이다.) 그 사이 공간의 균열을 내는 것은 권위의 불균형이 있을 수 있다. 다만 내가 속해 있는 말씨름을 좋아하는 모임에는 그런 권위가 사람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그림은 균열을 내도 되지만, 사람이 내서는 안 된다는 식이다. 대화의 긴장감! 우리는 말의 교환 이상의 감각을 얻어가고 있다. 서로의 세계관을 확인받고 있다.
아니, 오해는 없으면 한다.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란 말이지. 나는 유아적으로 그림을 그리고 있다. 직관적으로 살아가고 있다. 겁도 없이 말이다. 나는 용감한 사자자리. 좌절의 순결조차 잃은 적이 없다고. 으름장을 놓고 있다.
07-28-2024
죽음이라는 것은 대자연 속으로 한순간에 빨려 들어가는 것이다. 죽음에 대한 공포보다 납득과 순종을 하는 것이 어렵지 않다는 것은 순간의 향락을 가능하게 하고, 그것의 축적 끝에 결국 고통과 쾌락의 경계가 없어진 것 또한 받아들이게 한다. 다만, 죽음이 한없이 가볍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육체 안에 갇힌 정신이 내리는 오만일지도 모른다. 고작 정신을 캔버스 위로 전이시키는 것으로 신의 흉내를 내며 만족할 때, 병처럼 붙어버리고 마는 패배감을 잊지 말자. 나는 우연의 연쇄 끝에 운명적 죽음이 있는 것이 아닌, 운명의 연쇄 끝에 우연한 죽음이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우연한 죽음을 책망하고, 그것이 운명적인 생을 앗아간 것에 대해 슬퍼하는 것이 본래 인간이 인간답게 행해야 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럴 때에 세상을 먼저 떠난 사랑하는 사람들을 생각하면, 심장이 납덩이가 되어 나의 얼굴까지 벗겨 불명의 지하로 추락하는 경험을 한다.
07-26-2024 (2)
나는 인간은 인간답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자주 피력해왔다. 5월에 잠깐 한국에 들렸을 때, 아주 예쁜 친구가 골똘히 생각하는 표정을 짓고나서, 내게 내가 말하는 인간다움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짐승과 구분되는 것.’
나는 이렇게 답한 후, 몇 번이고 이 대답을 되돌아보았다. 속이 후련한 답이 되지 못한 것이다. 짐승과 구분되는 것? 나는 무슨 이야기를 해버린 것인가. 코끼리가 거센 강물을 새끼와 함께 건널 때, 새끼가 물살을 버티지 못할 것이라는 두려움을 안고도 행하는 순종과 내가 주장하는 인간다움을 분리할 수 있다는 말인가. 완전한 항복을 기반으로 하는 자학, 생태계의 사명대로 행하는 그것이 내가 기리는 영웅의 모습이 아니었던가. 그 오류를 넘어서 나는 왜 내가 함부로 그런 이야기를 했는지에 대해 생각했다. 분명히 이유가 있었을 것이라 생각했다. 예쁜 친구의 이목구비에 조급해져 경솔한 대답을 한 것만은 아닐 것이라고.
짐승과 구분되는 인간의 모습은 ‘의심’이다. 어떤 것을 행하는 데서 나타나는 의심, 즉 완전한 항복을 불가능케 하는 의심이다. 인공적으로 코끼리의 담대함을 닮는 것은 자연적으로 행하는 짐승과 구분된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어떠한 의심 없이 선택을 내리는 짐승과 구분된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내가 순수를 지켜내는 것이 아니라 이루어내는 것이라고 말한 것과 일치한다. 청소년기에 동심에 반하는 낯선 현상을 겪을 때, 번뜩 빛나는 순수함이 있다. 그때부터 우리는 어떤 것을 지킬 것인지, 버릴 것인지에 대한 선택을 하고, 그러한 선택들의 축적 끝에는 연속된 무너짐이라는 집단적 결론만이 도출된다. 그러한 무너짐은 필연적이며, 내가 말하는 인간다움의 필수조건이 된다. 그 이후에 인공적으로 순수함을 쫓는 것, 또 그것을 소망하는 마음이 있다. 그것을 두고 나는 인간다움을 규정한다. 불가능성을 알면서도 무작정 쫓고자 하는 마음에야말로 코끼리의 담대함을 뛰어넘는 숭고함이 있기 때문이다.
그림을 배우고 배운 것을 버리는 과정 또한, 내가 규정하고 지향하는 인간다움을 닮았다. 배움과 의심, 그것이 결국 순수함에 근접한 진정한 항복의 필수조건임을 나는 강조하고 싶다.
07-26-2024
XX아, 잘 지내고 있지? 가끔 너의 인스타그램 계정에 들어가서 그림을 보고 그래. 내가 너의 그림을 좋아하니까. 오늘도 뉴욕에 함께 있는 친구에게 너의 그림을 보여주다가 너의 근황이 궁금해서 안부 인사를 하러 왔어. 겸사-겸사.
나는 그림 아래 화가가 있다고 생각하거든. 그런 자세가 느껴지는 그림이 좋고, 좋은 그림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너의 그림이 좋은 것 같다는 말밖에 할 수가 없겠다.
그림을 통해서 이상에 도달하고자 하는 것, 그 불가능성을 알면서도 이상에 도달하고자 하는 개인의 사명감만이 가장 이상과 닮았다는 것, 이렇게 이야기를 해도 넌 쉽게 알아들을 수 있을 것 같아. 그러면 편할 것 같아.
이런 모든 것들이 결국 너를 행복하게 하느냐 묻는 질문은 무의미할 테니 삼가하는 것이 맞을 거야.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고 우리가 아무런 의심이 없다면 행복하지 못할 일은 없을 테니 말이야. 다만 늘 우리는 의심을 가지지. 그런 세상에서는 의심이 우리에게 단발적으로 선명한 자유의 감각을 주기도 하거든.
나는 가끔 상상력에 너무 큰 힘을 주는게 있어서 (망상에 몰입을 한다는 이야기), 사실 너는 내가 하는 말에 큰 공감을 못할지도 몰라. 몇 년 전 (우리가 홍대에서 작업실을 같이 쓸 때), 너에게 내가 어린 시절에 키우던 슈나우저를 닮은 강아지를 데리고 와서 같은 이름을 붙여 키우고 싶다고 이야기했을 때, 너는 그것이 이상하다고 했거든. 난 네가 그때 분명 이해할 거라고 생각해서 한 이야기인데 말이야. 거절을 딱 당해버렸지.
나는 그래도, 완전히 잘못 짚었던 거라도, 너의 그림을 똑같이 좋아할 수 있을 것 같아. 혼란스럽기야 하겠지만.
계속 연락이 닿았으면 좋겠어.
01-26-2024
분명히 알았는데 이제는 알기 싫은 것이 있다. 회전하는 삶에서 반대 지점을 적대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타자화된 과거만큼이나 책임을 버리기 쉬운 것은 없는 듯하다. 모두가 무고를 주장한다. 분명 서로 죄인이라 손가락질하는 것에는 변함이 없음에도 말이다. 분명 내가 적대하는 반대 지점에 나의 발바닥이 붙었던 적이 있다. 다만 나는 이것을 잘 기억하지 못한다. ‘사람을 때린 적은 없잖아요?’ 라는 물음에 부정하는 답보다 더 정확한 답변은 사람을 죽도록 팼어도, 기억을 잘하지 못했을 거라는 것이다.
사람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현 지점보다 객체의 회전하는 이동성을 사랑해야겠다. 생명력을 사랑해야겠다.
12-27-2023
사랑이 목표가 된 순간부터 절대적으로 불가능해졌다. 순수는 지키는 것이 아니라 이루어내는 것이라는 논리를 지었을 때부터 그것이 불가능해졌다. 미술을 도구화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을 때부터 그것이 불가능해졌다. 이 모든 것이, 무조건적으로 절망을 통해야만 희망이 보인다는 것을 알고 기다리는 순간 불가능해진 탓일까? 다만, 이런 사랑, 순수, 미술, 희망. 조금의 오염도 허용하지 않는 것들을, 애초에 불가능한 것을 알면서도 간구하는 인간의 마음만큼은 순수하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간구하는 마음 하나만 우리에게 허락된 이상이라는 생각을 한다. 비롯된 생각, 말, 행동은 퇴보만 될 뿐이라는 생각에 메리토크라틱하다고 주장하는 자본주의에서 자리매김할 의욕이 없다. 간구하는 마음뿐만이 중요하니, 삶은 그것과 떨어뜨려 놓는다고 이야기하기에는, 이쯤에 벌써 우리는 얼마나 우리가 쉽게 무감각해지고, 무뎌지고, 더러워지는지 잘 알고 있지 않는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다음으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절제, 학습, 훈련의 기반으로 사는 것이겠다. 임윤찬 피아니스트가 산속으로 들어가서 피아노만 쳐도 좋겠다고 이야기했던 것이 너무나도 유토피아와 같다는 생각에 소름이 돋아 기억에 남는다. 이것이 나의 상태에 물들지 않는 진심이다.
그렇다면 악기 들고 산으로 들어가던가. 천이랑 물감 들고 절에 들어가던가. 한국에 돌아가서 봉사활동에 한 몸을 바치거나 할 생각을 해야 하는데 발이 미국 땅에 붙어 떨어지지를 않는다. 물질 없이는 가능하지 못한 생각들에 이르렀을 때는, 이미 게으르다. 그 절망을 뚫으면 또 뭐가 있을까? 더욱 편안한 것을 가능하게 하는 업그레이드의 세상에서 이상에 대해 고민하는 예술만큼은 돌고 도는 것 같다. 패션, 가구, 미술도 다 돌고 돈다.
11-27-2023
어릴 때 봤던 텔레비전에는 작위성이 눈에 띄었고, 그 작위성의 구조, 형태에 조금 더 관심을 많이 갖도록 했다. 어떤 맥락도 없는 댄스 타임이 있다든지, 녹음된 방청객의 소리가 나타났다가 사라졌다가 하는, 그런 연극적인 구조와 장치들이 많았다. 이것은 모두 당신을 위한 쇼! 그런 작위성이 오히려 이제는 현실에서 나타난다. 우리는 작위적인 설정인 마냥, 언제부터 철저한 공식에 충성하며 살아간다. 영적인 것은 나부끼는 비효율로 치부되기 마련이다. 영적인 것 마저 효율적으로 쟁취하고자 하는 사람도 있다. 그 사람은 본인의 현명함에 아주 만족스러워하는 눈치다. 어쩌면 그는 인간에게 허락된 범위에서 최선을 다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만, 그것이 되려 오염의 존재를 확인시켜주는 것에 대해 좌절을 느낄 줄도 몰라 보였다.
어릴 때는 텔레비전을 보는 것이 싫지 않았다. 오히려 좋았다. 엄마가 외출하시면 나는 여느 아이처럼 몰래 텔레비전을 보았다. 다만 그것이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이게 위협적인 영향을 주기 시작했을 때는, 현실에 작위성이 강해지고, 매치된 세계는 부단히 유기농 해지기를 노력했을 때부터다. 핸드폰에서 처음 보는 여자가, 혹은 남자가 친밀한 각도로 나더러 어떻게 살라고 조언한다. 다양한 결의 조언이 있다만, 그것이 나에게 선택의 자유를 주는 눈속임으로, 이러한 현상 속에 나도 있음을 반복적으로 확인시켜 주는 일이다. 기억해? 너도 여기의 일부야. 너도 치정에 더럽혀진 사람이야. 쉽고, 빠른 것에 매료되는 사람이야. 근데 괜찮아- 우리가 모두 그러거든. 이런 식. 어릴 적부터 특별하다는 말을 가장 마음에 새기고 살았던 중에 이런 보편성으로 공감받는 것이 달갑지도 않고, 매 순간 매초 나는 영상이 내게 상기시키는 것들과 씨름을 벌여야 한다는 것이 피로했다. 나는 텔레비전이 정말 보기 싫었다. 집에 들어오면 켜져 있는 텔레비전이 너무 싫었다. 밥을 먹을 때마다 틀어져 있는 쓰레기 같은 영상이 정말 정말 싫었다. 자기 전에 보였던 저질적인 영상이 정신의 이파리를 썩히는 감각이 선명하게 기억된다. 인간이 자꾸 실망스럽다. 물론 나를 포함해서 말이다.
관계결벽증이라는 프레임을 애초에 부여받을 때의 상황은 상대가 나를 굉장히 혼내는 상황이었다. 관계결벽증, 결국 관념결벽증이라며 아주 질타를 받는 상황이었다. 다만 사람의 머릿속을 소독할 수는 없지 않은가. 인터넷을 무슨 때늦은 전체주의처럼 통제할 수도 없지 않은가. 그래도 아쉬울 것은 없다고 본다만. 표현의 자유? 정말로? 오가닉 한 텔레비전의 유혹으로 우리는 표현의 주체성을 잃은지 오래다. 하지만 원초적으로 불가능한 주체성이라는 전제 아래, 미시적인 접근을 하고자 했을 때, 도대체 어디까지가 보편적으로 주체적이다 표할 수 있는지 아무도 결정할 수 없다는 것이 문제다. 내 자신을 돌아본다. 정말 순수를 일구어내기 위해 부단히 살아오고, 소녀 같은 부드러운 마음을 가지기 위해 노력했다만. 결국 나는 정말 노력했어. 라는 말밖에 할 수 없다. 이미 신 아래에 모두 죄인이라며, 나를 타인과 엮을 때, 어떤 반박을 할 수도 없어, 씩씩거리며 심장이 터질 거 같은 심경을 느끼지 않았는가.
나는 정말 노력했어. 라는 말밖에 하지를 못한다. 나는 정말 노력했어. 유치한 첫사랑을 마친 남자아이처럼 말이다. 과정이 중요하다는, 그런 호의를 베푸는 듯한 이야기는 하기도 싫다. 결국 나의 발을 실존 증명으로써의 감각에 붙여주는 것은 과정도, 결과도 아닌, 단순한 응시의 기억이다. 세살 때, 엄마가 설거지를 하는 동안, 발밑에 앉아 허공을 응시하는 기억. 중학교 때, 교제를 하던 남자친구와 아파트 정자에 앉아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를 응시하는 기억. 차를 타고 뒷좌석에 앉아 대학에 통학을 하면서, 창문 너머 허름한 ‘왕궁 아파트’를 응시하는 기억.
나는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지면서도 실존을 증명받는 삶을 살고 싶다. 나를 부여잡는 응시의 순간들만 축적해 가며, 동시에 모든 것에서부터 제외 받는 것 말이다. 고등학교 때 어떤 변덕으로 첫 도둑질을 하고, 길거리를 뛰어 도망쳐 도달했던 해방의 지점의 영원한 지속을 나는 두려울 만큼 갈망한다. 나는 스스로에 대해 용서 없이 산다고. 신의 용서와 무관하게. 알량한 양심과, 그저 질서를 모르는 돼지가 되기에 싫은 마음의 정도의 비율을 알 수는 없다만. 동시에 벌을 받는다 생각하며 단잠을 기리는 것은 또 얼마나 부끄러운 짓인가.
난 미술을 한다는 것이 죄에서 도망치는 것에서부터 역설적으로 받는 고통을 기반으로 계속 용서를 빌라는 벌을 받는 일이라고도 생각이 든다.
09-12-2023
가슴을 푹 찌르는 절실함만이 사랑의 징표다. 11/27/2022
접근할 수 있는 사랑은 몰입을 통한 구원의 감각적 체험이다. 본질인 구원이 아닌, 몸속 장기들부터 발끝까지로 섬세하게 느껴지는 하나의 체험이라 이제는 답할 수 있겠다.
09-05-2023
나는 서울에 가는 비행기에 올라탔다. 잠을 조금 자고 일어나서 펼쳐 안은 책으로 명치를 꾹꾹 누르며 울음을 터뜨렸다. 서울도 뉴욕도 아닌 망망대해 대기 어느 곳에서는 아무렇게나 감정에 쓸려버려도 될 거 같았다.
요즘 하는 생각은(더 정확히는 다시, 또다시 회귀한 생각은) 사람들은 서로 그다지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스스로를 아는 만큼 상대를 알 수가 있고, 반대로도 그렇다. 나를 아는 것과 타인을 아는 것의 정도에 차이가 없다면, 우리는 그저 증거를 창출하기 위한 공생의 목적으로 몸이 나뉘어 존재하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최근 대화들을 통해 대체로 거울 치료를 하고 놀라 튕겨 나가서는 그 반대로 행동하려고 하다가, 또 그것을 비추는 거울을 들이미는 사람을 물리치는 일을 반복했다. 거울이 너무 많아서, 죄인을 분간하기가 어렵다. 죄의 무게 또한 차별화하기가 어렵다. 이것은 자유를 빼앗고 숨을 꾹 눌러 막는 일이다. 다만 그런 수많은 거울을 대면하고 살아가는 것이 위로되기도 한다. 누군가 보고 싶을 때 나를 통해서 그를 볼 수 있으니 말이다. ‘서로 그다지 다르지 않음.’ 이 덕에 나는 누구도 이제 그리울 이유가 없다.
이런 비슷한 이야기를, 1년 전 같은 뉴욕에서 서울에 가는 비행기에서, 슈나우저 이야기를 하며 적은 적이 있다. 그 이야기를 적고 나는 한동안 회귀하지 않았었던 것. 그것을 희망으로 여겨도 되는지 생각해 봐야겠다.
08-14-2023
오늘은 정말 여유가 많았다. 하루 종일 침대에 있었다. 이럴 수 있었던 날이 정말 오랜만이다. 시간을 통째로 가져다 버렸다. 며칠째 하려고 했던 이야기를 오늘에서나 드디어 다 쓸 수 있겠다.
다시 줄러어드 리사이틀 이야기를 해야겠다. 대규모 홀에서 진행되는 필하모닉에 비해 학생들의 연주회는 작은 공간에서 이루어진다. 피아니스트의 친구 혹은 애인이 된 것처럼, 그렇게나 가까이서 연주를 들을 수 있다. 도저히 대체할 수 없는 경험이다. 그렇게나 가까이서 연주자의 손가락, 옷깃, 표정, 구두를 보고, 음악이 아닌 소리: 연주자의 숨소리, 패달이 밟히며 내는 장치적인 소리, 건반이 눌려 음을 내기 전에 연주자의 손끝과 닿아 나는 야릇한 소리를 들을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더더욱이나 숨을 죽이고, 재채기를 눌러 참는다. 그렇게 얼어붙은 상태로 피아니스트가 연주하는 곡을 듣고, 그를 바라볼 때는 마치 신을 바라보듯 한다. 더 정확히는 그를 통해 신을 바라보듯 한다. 그 연주에는 피아니스트가 수없는 시간을 불편한 자세로 스스로를 통제하며 다듬은 정조가 있다. 그것이 주는 숭고한 위엄은 무언의 합의가 된 것이다. 캄캄한 의자에서 우리는 그것을 관음하고 스스로가 그것을 오염시키는 짐승이 될까, 의자 아래에 감춘 부숭부숭한 발을 들킬지 두려울 뿐이다.
줄리어드 발표회를 보고 난 뒤의 단점은 즉각적으로 그림 그리기가 정말 싫어진다는 것이다. 몇 시간의 연주에도 관객들에게 응당한 몰입을 요구하는 음악에 비해 우리는 갤러리에서 3초 이상 시선을 잡는 게 목표라고 이야기한다. 응당한 몰입을 당당히 요구하는 것은 전시의 유한성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어떤 전시가 이번 달 말까지라는 말에는 발걸음을 재촉해 갈 수밖에 없다. 다만 관객을 한 공간으로 모은 이후로부터는 처절한 구걸의 시작이다. 좀 더 이전으로 가면, 애초에 전시에 입성하기 위해서는 실제로 관심의 구걸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글을 통해서든, 미모를 팔아서든, 웃음을 팔아서든. 뭔가는 팔아야 한다. 그것이 그림만 될 수 없다는 것을 부정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합의된 숭고한 위엄이 없기 때문이다. 다 때려 부수고 무너뜨리고 자체도 무너지는 예술에서 어떤 정조를 찾고 우러러볼 수 있냐는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림을 이용, 도구화하는 것이 아닌, 클래식 음악과 닮은 예술을 해야 한다. 페인팅은 페인팅에 대한 페인팅이어야 하고, 페인팅의 언어와 물질 아래에서 겸손한 자세로 작업을 해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그 모든 것이 발밑에 있다고 생각하는 그림을 존중한 적도 없다.
08-07-2023
안녕, 이런저런 글을 읽다가 네가 말하는 공회전이 떠올라서 문자를 보내. 너한테 물어보고 싶었던 것이 있었는데, 네가 말하는 공회전(idling)이라는 어휘는 어떻게 쓰게 된 거야? 비트겐슈타인의 영향을 받은 건지 다른 자료에서 영향을 받은 건지 알고 싶어.
안녕하세요! 바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를 읽고 저는 공회전이라는 말이 처음 떠올랐습니다. 한글로 처음 떠올린 이 말을 분석하자면, ‘비어있음’과 ‘회전’이라는 뜻이 결합된 파생어인데, 그것이 주는 모순의 인상이 흥미로웠어요. 회전이라는 것이 이동을 꼭 보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비어있다는 것이 역설이라는 즉각적인 착각이 재밌다고 생각을 했거든요. 꼭 저희가 대화를 하는데 있어서도 소통이 보장된 것이 아닌지만은 소통 없는 대화라고 하면 실패한 대화라고 생각하듯이요.
[…]
카벨을 읽는데 어려움은 그가 굉장히 공회전하듯이 글을 써서, 끝에는 도무지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모르겠다는 거야.
그것이야말로 그가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해 주는 것 같네요.
재밌네 - 그런 거 같아.
제니퍼 마자, 전 석사 논문 지도 교수님과의 문자 내용 중
07-25-2023 별을 세고, 생을 느끼고자 뚫은 천장에 빠진 사람의 발이 요란이다.
벌레라고 하기에는 크고, 새라고 하기에는 작은
주먹만한 생명이 창에 쿵 하고 추락했다.
생은 위에 있다. 승리는 위에 있다. 사랑은 위에 있다. 따뜻한 위로에 미소를 띄어 올리기에 바빠, 사람들은 떨어진 생명을 수색하지 않는다. 그것은 기리는 영웅의 몫.
한편 미국땅 같은 곳에서, 생을 느끼고자 뚫은 천장에 빠진 사람의 발이 요란이다. 소녀의 사랑으로 뿌리 박힌
두개의 발바닥.
깡패의 욕설을 뱉는. 그것이 이별만큼 고집스럽게 자라 생에 닿기를.
07-19-2023
당장 며칠 뒤면 2년간 살았던 이 집을 떠나야 하는데, 도무지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다. 이렇게 소파에서 마음껏 우쿨렐레를 치는 것도 이제 다 끝이겠다. 이 집은 내게 참 잘해줬다. 내가 그토록 미워하고 정리를 몇 번이고 하려고 했어도, 실패 끝에 간사한 내가 다시 돌아오면, 그 자리 그대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 감시 없이는 바퀴벌레에게 온몸을 내주었을 것으로 의심했건만. 책상에 먼지 한 톨 쌓이지 않은 채 나를 기다렸다, 그림처럼 말이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이 집에 왔었다. 나는 그들에게 이곳에서 익힌 맛있는 요리를 대접했다. 비좁은 단칸방에서 아무런 의지도 없이 우리는 서로의 시야에 걸쳤다. 그처럼 모든 게 쉬웠다. 미워한 이 집이 나를 기억하고, 기다려준 것처럼 내가 미래에 이곳을 뚜렷이 그릴 수 없을 것 같아서. 내게 여유가 생겼을 때는, 너는 이미 다른 것들로 메워져 있겠구나.
07-17-2023
미디어의 싸구려 정보, 자극적인 이미지에 정신을 내어주지 않고, 더 영웅적인 것을 꿈꾸고 실천하는, 불가능을 상상하고, 상상력에 모든 힘을 실어주는, 주님과 닮은 사랑을 하는.
자학적으로, 순수는 지키는 것이 아닌, 이루어내는 것임을.
11-13-2022
미술은 혁명과 반혁명의 혼재로 빚어진다. 무엇을 회전하는 힘에는 기존의 위치에서 벗어나려는 동력에서부터 있다만 공회전에서는 진전과 퇴보를 판가름 할 수가 없다. 어느 순간 어디로 가는지는 중요하지 않아졌다. 걸음을 기억하는 것만이 허락된 자주성.
사명을 부단히 발견하고자 함 - 그것만이 그림의 상징, 그대로 공회전에 녹아드는, 영속을 가능케 하는 친생태계성을 가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