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26-2024 (2)

나는 인간은 인간답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자주 피력해왔다. 5월에 잠깐 한국에 들렸을 때, 아주 예쁜 친구가 골똘히 생각하는 표정을 짓고나서, 내게 내가 말하는 인간다움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짐승과 구분되는 것.’

나는 이렇게 답한 후, 몇 번이고 이 대답을 되돌아보았다. 속이 후련한 답이 되지 못한 것이다. 짐승과 구분되는 것? 나는 무슨 이야기를 해버린 것인가. 코끼리가 거센 강물을 새끼와 함께 건널 때, 새끼가 물살을 버티지 못할 것이라는 두려움을 안고도 행하는 순종과 내가 주장하는 인간다움을 분리할 수 있다는 말인가. 완전한 항복을 기반으로 하는 자학, 생태계의 사명대로 행하는 그것이 내가 기리는 영웅의 모습이 아니었던가. 그 오류를 넘어서 나는 왜 내가 함부로 그런 이야기를 했는지에 대해 생각했다. 분명히 이유가 있었을 것이라 생각했다. 예쁜 친구의 이목구비에 조급해져 경솔한 대답을 한 것만은 아닐 것이라고.

짐승과 구분되는 인간의 모습은 ‘의심’이다. 어떤 것을 행하는 데서 나타나는 의심, 즉 완전한 항복을 불가능케 하는 의심이다. 인공적으로 코끼리의 담대함을 닮는 것은 자연적으로 행하는 짐승과 구분된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어떠한 의심 없이 선택을 내리는 짐승과 구분된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내가 순수를 지켜내는 것이 아니라 이루어내는 것이라고 말한 것과 일치한다. 청소년기에 동심에 반하는 낯선 현상을 겪을 때, 번뜩 빛나는 순수함이 있다. 그때부터 우리는 어떤 것을 지킬 것인지, 버릴 것인지에 대한 선택을 하고, 그러한 선택들의 축적 끝에는 연속된 무너짐이라는 집단적 결론만이 도출된다. 그러한 무너짐은 필연적이며, 내가 말하는 인간다움의 필수조건이 된다. 그 이후에 인공적으로 순수함을 쫓는 것, 또 그것을 소망하는 마음이 있다. 그것을 두고 나는 인간다움을 규정한다. 불가능성을 알면서도 무작정 쫓고자 하는 마음에야말로 코끼리의 담대함을 뛰어넘는 숭고함이 있기 때문이다.

그림을 배우고 배운 것을 버리는 과정 또한, 내가 규정하고 지향하는 인간다움을 닮았다. 배움과 의심, 그것이 결국 순수함에 근접한 진정한 항복의 필수조건임을 나는 강조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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