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7-2023
어릴 때 봤던 텔레비전에는 작위성이 눈에 띄었고, 그 작위성의 구조, 형태에 조금 더 관심을 많이 갖도록 했다. 어떤 맥락도 없는 댄스 타임이 있다든지, 녹음된 방청객의 소리가 나타났다가 사라졌다가 하는, 그런 연극적인 구조와 장치들이 많았다. 이것은 모두 당신을 위한 쇼! 그런 작위성이 오히려 이제는 현실에서 나타난다. 우리는 작위적인 설정인 마냥, 언제부터 철저한 공식에 충성하며 살아간다. 영적인 것은 나부끼는 비효율로 치부되기 마련이다. 영적인 것 마저 효율적으로 쟁취하고자 하는 사람도 있다. 그 사람은 본인의 현명함에 아주 만족스러워하는 눈치다. 어쩌면 그는 인간에게 허락된 범위에서 최선을 다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만, 그것이 되려 오염의 존재를 확인시켜주는 것에 대해 좌절을 느낄 줄도 몰라 보였다.
어릴 때는 텔레비전을 보는 것이 싫지 않았다. 오히려 좋았다. 엄마가 외출하시면 나는 여느 아이처럼 몰래 텔레비전을 보았다. 다만 그것이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이게 위협적인 영향을 주기 시작했을 때는, 현실에 작위성이 강해지고, 매치된 세계는 부단히 유기농 해지기를 노력했을 때부터다. 핸드폰에서 처음 보는 여자가, 혹은 남자가 친밀한 각도로 나더러 어떻게 살라고 조언한다. 다양한 결의 조언이 있다만, 그것이 나에게 선택의 자유를 주는 눈속임으로, 이러한 현상 속에 나도 있음을 반복적으로 확인시켜 주는 일이다. 기억해? 너도 여기의 일부야. 너도 치정에 더럽혀진 사람이야. 쉽고, 빠른 것에 매료되는 사람이야. 근데 괜찮아- 우리가 모두 그러거든. 이런 식. 어릴 적부터 특별하다는 말을 가장 마음에 새기고 살았던 중에 이런 보편성으로 공감받는 것이 달갑지도 않고, 매 순간 매초 나는 영상이 내게 상기시키는 것들과 씨름을 벌여야 한다는 것이 피로했다. 나는 텔레비전이 정말 보기 싫었다. 집에 들어오면 켜져 있는 텔레비전이 너무 싫었다. 밥을 먹을 때마다 틀어져 있는 쓰레기 같은 영상이 정말 정말 싫었다. 자기 전에 보였던 저질적인 영상이 정신의 이파리를 썩히는 감각이 선명하게 기억된다. 인간이 자꾸 실망스럽다. 물론 나를 포함해서 말이다.
관계결벽증이라는 프레임을 애초에 부여받을 때의 상황은 상대가 나를 굉장히 혼내는 상황이었다. 관계결벽증, 결국 관념결벽증이라며 아주 질타를 받는 상황이었다. 다만 사람의 머릿속을 소독할 수는 없지 않은가. 인터넷을 무슨 때늦은 전체주의처럼 통제할 수도 없지 않은가. 그래도 아쉬울 것은 없다고 본다만. 표현의 자유? 정말로? 오가닉 한 텔레비전의 유혹으로 우리는 표현의 주체성을 잃은지 오래다. 하지만 원초적으로 불가능한 주체성이라는 전제 아래, 미시적인 접근을 하고자 했을 때, 도대체 어디까지가 보편적으로 주체적이다 표할 수 있는지 아무도 결정할 수 없다는 것이 문제다. 내 자신을 돌아본다. 정말 순수를 일구어내기 위해 부단히 살아오고, 소녀 같은 부드러운 마음을 가지기 위해 노력했다만. 결국 나는 정말 노력했어. 라는 말밖에 할 수 없다. 이미 신 아래에 모두 죄인이라며, 나를 타인과 엮을 때, 어떤 반박을 할 수도 없어, 씩씩거리며 심장이 터질 거 같은 심경을 느끼지 않았는가.
나는 정말 노력했어. 라는 말밖에 하지를 못한다. 나는 정말 노력했어. 유치한 첫사랑을 마친 남자아이처럼 말이다. 과정이 중요하다는, 그런 호의를 베푸는 듯한 이야기는 하기도 싫다. 결국 나의 발을 실존 증명으로써의 감각에 붙여주는 것은 과정도, 결과도 아닌, 단순한 응시의 기억이다. 세살 때, 엄마가 설거지를 하는 동안, 발밑에 앉아 허공을 응시하는 기억. 중학교 때, 교제를 하던 남자친구와 아파트 정자에 앉아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를 응시하는 기억. 차를 타고 뒷좌석에 앉아 대학에 통학을 하면서, 창문 너머 허름한 ‘왕궁 아파트’를 응시하는 기억.
나는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지면서도 실존을 증명받는 삶을 살고 싶다. 나를 부여잡는 응시의 순간들만 축적해 가며, 동시에 모든 것에서부터 제외 받는 것 말이다. 고등학교 때 어떤 변덕으로 첫 도둑질을 하고, 길거리를 뛰어 도망쳐 도달했던 해방의 지점의 영원한 지속을 나는 두려울 만큼 갈망한다. 나는 스스로에 대해 용서 없이 산다고. 신의 용서와 무관하게. 알량한 양심과, 그저 질서를 모르는 돼지가 되기에 싫은 마음의 정도의 비율을 알 수는 없다만. 동시에 벌을 받는다 생각하며 단잠을 기리는 것은 또 얼마나 부끄러운 짓인가.
난 미술을 한다는 것이 죄에서 도망치는 것에서부터 역설적으로 받는 고통을 기반으로 계속 용서를 빌라는 벌을 받는 일이라고도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