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14-2023

오늘은 정말 여유가 많았다. 하루 종일 침대에 있었다. 이럴 수 있었던 날이 정말 오랜만이다. 시간을 통째로 가져다 버렸다. 며칠째 하려고 했던 이야기를 오늘에서나 드디어 다 쓸 수 있겠다.

다시 줄러어드 리사이틀 이야기를 해야겠다. 대규모 홀에서 진행되는 필하모닉에 비해 학생들의 연주회는 작은 공간에서 이루어진다. 피아니스트의 친구 혹은 애인이 된 것처럼, 그렇게나 가까이서 연주를 들을 수 있다. 도저히 대체할 수 없는 경험이다. 그렇게나 가까이서 연주자의 손가락, 옷깃, 표정, 구두를 보고, 음악이 아닌 소리: 연주자의 숨소리, 패달이 밟히며 내는 장치적인 소리, 건반이 눌려 음을 내기 전에 연주자의 손끝과 닿아 나는 야릇한 소리를 들을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더더욱이나 숨을 죽이고, 재채기를 눌러 참는다. 그렇게 얼어붙은 상태로 피아니스트가 연주하는 곡을 듣고, 그를 바라볼 때는 마치 신을 바라보듯 한다. 더 정확히는 그를 통해 신을 바라보듯 한다. 그 연주에는 피아니스트가 수없는 시간을 불편한 자세로 스스로를 통제하며 다듬은 정조가 있다. 그것이 주는 숭고한 위엄은 무언의 합의가 된 것이다. 캄캄한 의자에서 우리는 그것을 관음하고 스스로가 그것을 오염시키는 짐승이 될까, 의자 아래에 감춘 부숭부숭한 발을 들킬지 두려울 뿐이다.

줄리어드 발표회를 보고 난 뒤의 단점은 즉각적으로 그림 그리기가 정말 싫어진다는 것이다. 몇 시간의 연주에도 관객들에게 응당한 몰입을 요구하는 음악에 비해 우리는 갤러리에서 3초 이상 시선을 잡는 게 목표라고 이야기한다. 응당한 몰입을 당당히 요구하는 것은 전시의 유한성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어떤 전시가 이번 달 말까지라는 말에는 발걸음을 재촉해 갈 수밖에 없다. 다만 관객을 한 공간으로 모은 이후로부터는 처절한 구걸의 시작이다. 좀 더 이전으로 가면, 애초에 전시에 입성하기 위해서는 실제로 관심의 구걸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글을 통해서든, 미모를 팔아서든, 웃음을 팔아서든. 뭔가는 팔아야 한다. 그것이 그림만 될 수 없다는 것을 부정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합의된 숭고한 위엄이 없기 때문이다. 다 때려 부수고 무너뜨리고 자체도 무너지는 예술에서 어떤 정조를 찾고 우러러볼 수 있냐는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림을 이용, 도구화하는 것이 아닌, 클래식 음악과 닮은 예술을 해야 한다. 페인팅은 페인팅에 대한 페인팅이어야 하고, 페인팅의 언어와 물질 아래에서 겸손한 자세로 작업을 해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그 모든 것이 발밑에 있다고 생각하는 그림을 존중한 적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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